어느 날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
그리고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내용은 잘 아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속에는 한 가지 중대한 핵심적 내용이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은‘네 몸같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는 흔히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처럼 생각합니다. 우리는 높은 차원의 사랑은 자신을 미워하고, 자신을 잃어버리며,
자신을 죽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고정적 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네 이웃을 사랑할 때 어떻게 사랑하라고 하셨습니까?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은 너를 사랑하지 말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네가 네 몸을 사랑하는 것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역으로 해석하면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웃도 사랑할 수 없고,
아무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 사랑은 모든 사랑의 출발입니다.
여러분!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누구를 무엇을 사랑하겠습니까? 자기를 비관하고 학대하는 사람이 이웃을 어떻게 사랑하겠습니까?
여러분! 죄인 된 우리를 살리시려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을 버리시고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즉 누구와 무엇으로도 바꿀 수없는 가치 있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믿음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밀알교회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자기를 사랑하자’라고 하니 자기 사랑을 오해하는 분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를 부인하라고 하셨는데 ‘사랑하라니요?’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미워해야 할 자기와 사랑해야 할 자아를 구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자기를 미워하는 것에서의 자기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의 ‘자기는 다릅니다.
미워해야 할 자기는 십자가에서 못 박은 아담의 옛 성품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이기주의적인 자아요. 사랑해야 할 자아는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자기인 것입니다.
거듭난 새 성품을 이야기 합니다. 아담의 옛 성품인 이기주의적인 자아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국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 형상으로서의 자기를 사랑하는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은 아담의 생명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옛사람이 아니라 새사람이 우리의 진정한 정체성입니다. 이 새 사람으로 거듭난 나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나를 사랑하여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도 나를 사랑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정하시므로 나도 나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용납하시므로 나도 나를 용납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시각으로 자기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고, 자기를 참으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자신을 사랑합시다.
요한복음 3장 16절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사랑한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고 믿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여 나 자신을 용서하며 회개하고,
우리 자신을 미워하며 정죄하지 말고 사랑하여 이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